정승화 육군참모총장
5·16 쿠데타 때의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이 그랬듯, 1979년 12·12 당시의 정승화 참모총장도 군사정변의 희생양이 됐다. 장도영은 쿠데타를 사전에 인지하고도 방관하다가 쿠데타 정권의 얼굴마담이 된 뒤 숙청된 데 반해, 정승화는 미리 인지하지 못했고 쿠데타와 동시에 곧바로 연행됐다.
정승화가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전혀 경계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0·26 사태로 합동수사본부장을 겸하게 된 전두환의 월권행위를 정승화는 예사롭지 않게 바라봤다. 정승화는 4년제 정규 과정 출신인 육사 11기 이하보다는 10기까지의 비정규 육사 출신을 중용하는 방법으로 전두환을 견제했으며, 전두환에게 인사 불이익을 줄 계획도 세웠다. 이는 전두환을 다급하게 만들었다.
79년 11월 중순께 단행된 군 인사에서 비정규 육사 출신들이 군 요직에 배치되고 정규 육사 출신의 하나회 장교들이 배제되자, 전두환 중심의 하나회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군내 입지에 위기의식을 갖게 됐다. 12월 초순께 전두환이 잦은 월권행위와 군 지휘체계 문란행위 등으로 한직으로 인사 조치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도는 가운데, 정승화가 국방부장관 노재현에게 전두환의 인사 조치를 건의한 것이 알려지자, 전두환은 본인에 대한 인사 조치를 차단하고 하나회 소속 장교들의 군내 입지 보전을 위해선 군의 주도권 장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1929년 경북 김천에서 출생한 정승화는 비정규 육사인 육사 5기 출신이다. 육사 5기는 육사 8기와 더불어 훗날 5·16 쿠데타의 핵심 세력이 됐다. 박정희는 육사 8기생들의 '계획'과 '5기생들의 병력 동원'으로 쿠데타에 성공했다. 육사 5기 정승화는 서른두 살인 1961년 5·16 때 12사단 부사단장으로 쿠데타를 지지했다. 그해 8월 준장으로 진급한 그는 1978년 5월 육군대장으로 진급했고 1979년 2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했다.
10·26 사태로 계엄사령관을 겸하게 된 정승화는 최규하 대통령권한대행이 약했기 때문에 10·26 정국 하의 실질적 1인자였다. 그런데 그는 10·26 당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초청으로 궁정동 안가 식당에 대기하고 있었고, 거기서 해당 사태를 접했기에 김재규와의 연루 혐의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수사 책임자인 전두환과 충돌할 가능성이 있는 상태에서 계엄사령관 직을 수행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서도 정승화와 친해지려고 시도했던 전두환은 수사 중에 취득한 청와대 금고 9억 원 중 1억은 합수부 수사비로 남겨두고 6억은 박근혜에게 준 뒤 나머지 2억을 '총장님 쓰시라'며 정승화에게 들고 갔다. 정승화는 돈을 개인적으로 쓰지 않고 자신의 비서실장을 통해 은행에 예치하며 전두환의 선심에 마음을 열지 않았다.
전두환을 밀어내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던 정승화는 인사 조치로 전두환을 꺾으려 했다. 하지만 전두환 인사조치를 실행하기도 전인 12월 12일 밤 '전두환 군대'가 한남동에 들이닥쳤고, 정승화는 평생 잊지 못할 수모를 겪었다. 정승화가 수모를 당한 것은 권력을 향한 전두환의 움직임이 집요했던 탓이기도 했지만, 그가 전두환의 거사를 대비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전두환이 자신을 제거하는 거사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정승화는 쿠데타군에 끌려간 뒤에도 자신이 쿠데타를 당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전두환 때문에 자신이 끌려왔으리라고는, 지금쯤 전두환이 실질적 1인자가 돼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수감돼 있는 동안 정승화는 ‘김재규가 없는 말을 지어내 자신을 모함한 게 아닐까, 전두환이 수사 실적을 세우려고 최규하에게 허위 보고를 한 게 아닐까, 최규하가 뭔가 오해하는 게 아닐까’ 등등의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훗날 회고록에서 정승화는 붙들려 있는 동안에 자신이 했던 생각을 아래와 같이 정리했다.
정승화 : “김재규가 자신이 살기 위하여 나를 끌고 들어가는 어떠한 공모 주장을 하기 때문에, 합수본부 측에서 이를 근거로 최규하 대통령에게 은밀히 보고한 뒤 조사 재가를 받아 저희들 공로로 만들기 위해 수단을 안 가리는 짓을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다. 그래도 <노재현 국방장관이 손을 놓고 방관할 리는 없을 터이니 곧 사실이 밝혀지겠지>하고 생각했다."
정승화가 전두환의 쿠데타를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데는 그의 낙관적 시국관도 작용했다. 당시에, 쿠데타 같은 것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믿음, 참모총장인 자신의 위상에 대한 믿음이 그를 그렇게 낙관적으로 만들었다.
불과 18년 전에 쿠데타 성공 사례가 있었고 그 뒤로도 비슷한 시도들이 있었고 정승화 자신도 5·16에 힘입어 승승장구했음에도, 정승화는 자기 밑의 전두환이 자신을 상대로 그런 일을 벌일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다. 정승화가 그렇게 한 데는 전두환에 대한 어느 정도의 '업신여김'도 작용했다. 정승화는 2억 원을 들고 온 전두환을 '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군인' 정도로 이해했다.
정승화는 전두환을 도덕적으로 바로잡을 대상 정도로 가벼이 생각했다. 다른 금고도 아니고 상관의 금고를 건드린 사람이라면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낼 수도 있다는 점에 주목하지 않은 것은 정승화의 치명적 실책이었다.
정승화가 전두환을 소홀히 대한 데에 또 다른 요인도 있었다. 계엄사령관이었던 그는 전두환 같은 소장파 장군들보다 정치권의 3김씨에 더 주목하고 있었다. 유신독재 체제는 더 이상 안 된다는 생각과 함께, 정승화가 가진 또 다른 소신은 '3김씨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정승화는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김영삼에 의해 민주화가 진행되는 것과, 김종필까지 더해서 3김이 향후 정치를 주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승화는 훗날 회고록에서 '김대중은 공산주의자'라는 인식을 드러내면서 "그가 국민 앞에 내세우는 이상은 그럴 듯했지만, 실제로 정권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 같았다."고 밝혔다.
정승화는 당시에 이런 생각을 마음속에만 담아두지 않았다. 정승화는 1979년 11월 26일에 언론사 사장들을 모아놓고 '김대중은 사상이 불투명하므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못을 박았다. 김대중에 대한 기사 쓰기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었으며, 이는 계엄사령관의 영역을 벗어나 정승화가 정치 영역에 사실상 발을 내디딘 것이었다.
정승화는 크게 보아 아군인 김종필에 대해서도 반감이 있었는데, 김종필은 육사 8기였다. 박정희는 육사 8기를 이용해 육사 5기를 견제하고, 육사 11기 이하를 이용해 8기를 견제했다. 정승화는 박정희가 김종필을 소외시키는 것을 보면서 승승장구했는데, 박정희 정권 내에서 정승화가 차지한 기반은 김종필에 대한 견제를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정승화의 눈에는 3김(김대중·김영삼·김종필)이 모두 불편한 존재였다.
정승화는 '유신을 극복하되 3김은 안 된다'는 정세 인식을 갖고 10·26 이후에 대처했으며, "군에 대한 나의 영향력과 신임 등으로 스스로 판단컨대" 자신에 대한 군부의 도전이 없을 거라 여긴 그는 3김 견제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래서 그의 시선에는 '법리에도 둔하고 탐욕스럽고 주제넘은' 전두환이 들어올 공간이 별로 없었다. 도덕적으로 바로잡거나 인사 조치로 전두환같은 존재를 내쫓을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전두환보다는 지도자급인 김대중·김영삼·김종필의 움직임이 정승화에게 더 중요했다는 점은, 전두환이 옛 주군의 금고를 훔치는 선에 머물지 않고 아예 세상을 통째로 훔칠 가능성에 대해 정승화가 둔감해지도록 만드는 원인이 됐다.
먼 거리의 적만 집중견제하면 근 거리의 적을 놓치게 된다. 줄리어스 시저와 정도전이 그랬다. 진시황과 이방원은 근 거리 적의 씨 자체를 말려 수모를 피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