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동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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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열

장곡토 2023. 11. 10. 11:19

선동열 

 

현역 시절 마지막으로 제 역할을 했던 나이로 박찬호가 28세, 선동열이 선발투수로서 29세 마무리로 37세, 최동원은 29세였다. 최동원의 투수 수명이 짧았던 이유로 아마시절부터의 혹사가 꼽힌다. 박찬호의 투수 수명도 짧았는데 혹사와는 관련이 없고 화이어볼러였던 점을 들 수 있다.

 

선동열과 최동원은 모두 메이저리그에 갔어야 마땅했다. 두 사람 모두 메이저리그의 입질이 있었으나 당시의 병역법이 발목을 잡았다. 두 사람 모두 82세계야구선수권 대회 우승으로 병역면제 혜택을 입었으나 동일업종 5년 의무종사 조항에 걸렸다.

  

1981년 9월18일 ‘뉴욕타임스’는 ‘토론토가 최초의 한국인 선수와 계약했다. 이 선수는 최동원으로 23세 우완 투수다. 지난주 블루제이스 관계자가 한국을 방문해 계약금 61만 달러에 정식 계약했다’고 보도했다. 당시로는 파격적인 액수에 계약까지 마쳤지만, 메이저리그 진출 꿈을 접어야 했다.

 

아쉽게 최동원과 인연을 맺지 못한 토론토는, 이후 39년의 세월이 흘러 류현진(33)과 4년 총액 8000만 달러에 공식 계약했다.

 

  

1981년 양키스가 선동열에게 첫번째 입단 오퍼를 했고, 1984년 LA 올림픽이 끝난 후 계약금 50만달러라는 파격적인 제안으로 두번째 오퍼를 했다. 당시 1차지명 선수들이 13만달러, 15만달러를 받았던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조건이었다.

 

1981년 당시에는 양키스 뿐만 아니라 밀워키와 다저스가 '선동열 잡기'에 나섰고, 1984년 올림픽이 끝난 후에는 양키스와 더불어 다저스가 또다시 거액의 계약금을 내밀며 제안을 해왔지만 진출은 끝내 불발됐다.

 

82년 이후 5년이 흐르자 최동원은 투수 수명이 끝났고, 선동열은 국내에서 극강의 모습을 보일 당시였지만 메이저리그의 추가오퍼가 없었다. 만일 추가오퍼가 있어서 선동열이 메이저리그로 갔다면, 풀타임 선발로 3점대 자책 이하를 찍을 수 있었다. 

 

최동원도 77슈퍼월드컵 우승 직후 볼티모어에서 시그널을 보냈을 때와, 81년 터론토와 계약했을 당시 메이저리그로 진출했다면 풀타임 선발에 3점대 이하 자책이 가능했다. 선동열과 최동원이 메이저리그에서 통했을 것이란 추정의 근거는 국내에서의 압도적 모습보다 슈퍼월드컵, 세계야구 선수권, 대륙간컵, 올림픽 등 국제대회에서 보여준 성적이다. 80년을 전후한 시기의 푸에르토리코와 쿠바의 타선은 당시의 메이저리그 급이었다.

  

박찬호는 병역문제를 남겨둔 상태로 우선 메이저리그로 진출한 뒤 98아시안게임 우승으로 병역을 면제받았다. 병역을 면제받은 후 메이저리그로 진출할 의도였던 선동열과 최동원은 박찬호처럼 유학비자를 통한 우선적 메이저리그 진출방식을 알지 못했다. 

박찬호에게 길을 제시했던 다저스와 같은 원군이 선동열과 최동원에겐 없었다는 점이 애석하다. 

 

선동열은 1999년 주니치를 끝으로 현역 선수생활을 끝냈는데 이때도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기회가 있었다.

 

선동열 : "주니치에서 끝낸 후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한신 타이거스의 입단 제의가 있었다.주니치 우승 여행으로 미국에 갔을 때 보스턴 레드삭스에서도 2년 500만달러를 제시했다. 그때 정말 메이저리그에 갈 생각을 갖고 있었다. 선수로서도 뛰고 싶었지만 그보다 나중에 지도자가 된 후를 생각하면 메이저리그가 어떤지 한 번 경험하고 싶었다."

 

그러나 중간에 끼어있던 에이전트가 문제였다.

 

선동열 : "내가 생각한 조건보다 두 배 이상을 보스턴에 불렀다. 좋은 이미지로 끝내고 싶었는데 자꾸 돈 문제가 불거져 에이전트에게 ‘당신은 나와 맞지 않은 것 같다‘ 말하고 헤어졌다. 그 길로 은퇴를 결정했다.“

 

선동열의 1999년의 메이저리그 진출 불발은 불행 중 다행일 수 있다. 메이저리그는 버틸 수 있을 때만 가야 한다. 아마도 이 때 갔더라면 임창용이 남긴 메이저리그 흔적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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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저리그 팬이면 누구나 가장 기억에 남는 인생의 게임이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는 2004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 보스턴 레드삭스와 양키스의 6차전이었다. 3패로 몰린 후 보스턴이 양키스와 시리즈 동률을 달성하는 게임이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살 떨리는 순간이 이어진 것은 보스턴 레드삭스의 마무리 키스 폴크의 등장 이후 부터였다.

 

메이저리그 마무리 가운데 강력한 구위가 아닌 타자의 타이밍을 뺏는 투구로 마무리를 맡은 투수를 당시에 처음 봤다. 이런 마무리 투수는 키스 폴크 이후에도 메이저리그에서 찾기 힘들다. 당시에 왜 그렇게 보스턴에 열광했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분명치 않다. 

 

지금은 보스턴의 팬이 아니다. 아마도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좋아했던 때문으로 생각되며, 밤비노의 저주가 빈번히 회자되던 탓에 나도 모르게 보스턴의 광팬이 되었던 것 같다. 이 당시 페드로 마르티네스는 전성기에 비하면 이미 약화되어 있었고 이후에 다시는 전성기의 모습을 보이지 못했다.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전성기는 시기상으로 박찬호의 그것과 거의 일치한다. 제역할을 한 시즌 수(풀타임 선발에 3점대 이하 자책을 찍은 시즌)로는 페드로가 10, 박찬호는 4였다. 물론 전성기의 압도적인 면으로도 박찬호가 페드로 마르티네스의 상대는 못된다.

 

앞서는 상황에서 승을 지키려 나선 키스 폴크의 구위가 강력했으면 그렇게까지 불안하면서 손에 땀을 쥐진 않았을 것이다. 확률상 강력한 마무리의 블론 가능성은 낮기 때문이다. 하여간 당시에 마무리 투수의 일구일구에 혀가 마르고 좌불안석했다. 박찬호의 등판 게임을 훨씬 능가하는 긴장감이었는데, 20여 년이 지났는 데도 당시에 느꼈던 긴장감은 마치 어제 순간처럼 지금도 생생하다. 당시에 느꼈던 긴장감으로 필자는 감독 심경을 이해하게 됐다.

 

6차전을 4:2로 가져온 보스턴은 7차전 낙승을 거두고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정작 월드시리즈는 챔피언십시리즈에 비해서 매우 싱거웠다. 보스턴은 세인트루이스에 한게임도 내주지 않고 월드시리즈를 제패했다. 밤비노의 저주가 풀리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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