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가계도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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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 가계도 광해군

장곡토 2023. 6. 4. 11:41

선조 가계도 광해군

 

 

정비 소생의 왕자가 없었던 선조는 후궁 출신인 공빈 김씨에게서 임해군과 광해군을 낳았다. 장자인 임해군은 무식하고 난폭한 면이 있어 인심은 영민한 광해군에게 쏠리고 있었다. 광해군이 세살 때 모친인 공빈 김씨는 죽었다.

 

다른 후궁에게서 난 많은 왕자(14명)들이 각기 왕위를 넘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인빈 김씨는 자신의 소생인 어린 신성군(제14대 선조의 넷째 아들인 왕자)을 세자로 책봉시키려는 공작을 끊임없이 벌이고 있었다.

 

임진왜란으로 신의주로 피난을 가는 도중에 선조는 평양에서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광해군은 세자로서 분조(分朝, 임시로 세자에게 임금의 일을 대행하게 하는 제도)를 맡아 난리 중에 동분서주하며 그 소임을 다했고, 조정과 민간의 명망을 한몸에 받았다.

 

임진왜란 때 피난 갔다 돌아온 선조는 머무를 곳이 없었다. 경복궁이나 창덕궁, 창경궁과 종묘는 이미 피난갈 때 불타버렸다. 그래서 선조는 성종의 친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던 명례궁과 주위의 몇 채의 집을 합쳐 임시로 임금이 사용하는 시어소(時御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그곳에는 월산대군의 증손이 살고 있었는데, 선조는 이곳을 ‘정릉동 행궁’으로 삼아 1593년부터 16년 동안 살다가 세상을 떠났다.

 

선조 가계도 - 제 14대 왕 가계도

 

 

선조는 왕의 적자나 적손이 아니었다. 선조는 방계에서 왕위를 이은 첫 번째 왕이 되었다. 선조는 세자를 거치지 않고 즉위했기 때문에 명종비인 인순왕후의 수렴청정과 원로급 재상들의 도움으로 국사를 돌보다 17세가 된 이듬해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1600년(선조 33)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가 죽자, 선조는 새로 간택한 인목왕후와 1602년 결혼했는데 선조의 나이는 51세, 인목왕후는 19세였다. 그녀가 영창대군을 낳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문제가 발생하였다. 1608년 선조는 광해군에게 선위 교서를 내렸고, 얼마 후 승하(56세)하였다.

 

인목대비도 선조의 유명을 중시하여 광해군이 보위를 잇게 했고 광해군은 조선왕조 처음으로 덕수궁에서 즉위했다. 임진왜란 중 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은 적자도 장자도 아니었고, 명나라의 책봉도 받지 못해서 명분상 약점이 있었다.

광해군의 형 임해군은 왕인 동생 광해군을 비방하고 다녔고, 광해는 임해군을 교동도에 유배시켰다가 사약을 내렸다.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도 틈만 나면 광해군을 깎아내리려고 했다. 선조의 적자인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세력으로 인목대비와 그 아버지 김제남 등이 있었다. 광해는 1614년 6월 서소문 밖에서 인목대비의 부친을 죽이고 인목대비 아들인 영창대군도 강화도로 귀양을 보냈는데, 결국 이듬해 죽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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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영창대군의 나이는 불과 9세였고, 광해군은 1618년 인목대비를 폐위시켰는데 결국 부메랑을 맞았다. 조선시대에서 유일하게 자식이 어머니를 폐위시킨 사건이었으며, 계모이지만 어머니를 폐위한 것이 광해군의 원죄가 됐다.

 

인목대비 김씨는 선조의 계비였다. 계비는 왕비가 죽고 나서 새로 들어온 비였으며, 계비 역시 중전이었다.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의 어머니로서, 광해군이 선조의 뜻을 받들어 즉위할 때 중전으로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광해군은 인목대비를 경운궁에 유폐하고, ‘서궁’으로 격을 낮추었다. 1623년 선조의 손자인 28살 능양군은 48세인 삼촌 광해군을 쫓아내고 경운궁 즉조당에서 16대 왕(인조)으로 즉위했다.

인목대비는 대왕대비가 되었으며, 광해는 인목대비 앞에서 무릎 꿇어 앉혀지고 그녀가 외치는 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리고 인목대비가 적어준 38가지의 죄목을 큰소리로 따라 외쳐야 했다. 광해는 후궁과 연회를 즐기느라 반정에 신속하게 대응하지 못하고 죄인이 되어 강화도로 유배됐다.

 

유배지는 이후 제주도로 옮겨졌다. 광해군은 제주도 유배생활 4년 4개월만에 66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 광해군을 사사하려는 시도가 있기도 했으나, 이원익 등 광해군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중신들의 극렬한 반대가 있었고, 인조 본인도 선왕을 죽이는 것은 선례가 없다는 판단 하에 사사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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