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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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가계도

장곡토 2023. 11. 12. 07:45

정조 가계도

 

 

영조의 두 번째 정실부인이었던 정순왕후는 15세 어린 나이에 66세의 영조와 혼인했으며 아들이자 며느리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보다 10살이나 어렸다.

 

노론 가문의 딸로 왕실에 들어와 권력을 거머쥔 정순왕후는 사도세자가 역적으로 몰려 뒤주에 갇혀 죽기까지 이에 가담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정조가 즉위하자 이를 견제하고 정조의 어머니이자 한중록을 집필한 혜경궁 홍씨와도 격렬한 대립을 벌였다.

 

영조에게 사도세자를 음해해 아버지와 자식 사이를 갈라 놓은 집권 세력 노론은 사도세자 아들인 정조가 즉위하자 자신들의 권력을 잃을까 두려워 끊임없이 암살을 시도했다. 이 가운데 가장 치명적이었던 사건이 바로 ‘정유역변’이었다.

 

정조 즉위 1년인 1777년 7월 28일 밤,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한 정조가 서고이자 침전인 존현각에서 평상시처럼 책을 읽고 있었는데 지붕 위에 정체 모를 소리가 들렸고, 이를 수상히 여긴 정조가 홍국영을 불러 수사했다. 그 결과 자객이 지붕 위까지 침투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을 벌했던 사건이 정유역변이었다.

 

정순왕후는 '정유역변'이후 정조 독살시도 등에 연루됐다는 설은 있지만 '정유역변'이 일어난 정조 1년에는 드러내놓고 대립각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영화 등에서 혜경궁 홍씨가 정순왕후를 독살하려던 시도도 상상력의 산물이다.

 

정유역변의 범인은 홍상범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의 부친이 정조의 즉위를 반대하다 귀양을 가자 그가 이에 앙심을 품고 '정유역변'을 꾀한 것이라는 설이다. 정유역변은 궁성 호위무관과 나인까지 포섭해 진행됐지만 실패했고, 홍상범은 다시 범행을 시도했지만 이 때 투입된 살수가 잡히면서 '정유역변'까지 연루되어 거리에 묶어놓고 창으로 찔러 죽이는 책형에 처해졌다.

 

 

정유역변은 정조의 자작극이라는 설도 있다. 실제 반대파가 진행했다면 그렇게 허술하게 실패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이 자작극 설의 이유다. 정조가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구실을 만들기 위해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것이다. 왕 암살 음모는 엄청난 역모이기 때문에 이 주장도 전혀 경시할만한 설은 아니다.

 

‘정유역변’은 정조의 왕권이 얼마나 위태로웠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를 딛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조의 강인한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역사적인 순간으로 영화나 드라마에서 그려졌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꾸준히 다뤄진 정조는 사도세자 아들로 태어나 왕위에 오른 비극적 가족사는 물론 인재 육성과 신분 차별 철폐 등 성군으로서 노력한 왕이었다는 점에서 조선 역사상 가장 드라마틱한 인물 중 한 명이었다. 그는 역적으로 몰린 아버지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고 노론과 소론의 치열한 당쟁 속에서 정치적으로 엄청난 소용돌이를 거쳤지만,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도 미래를 꿈꿨던 강인한 인물이었다.

 

 

가계도 - 정조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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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의 삶

최고의 삶은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어 '자신이 하고싶은 것만 하고 사는 삶'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경제적 자립이 필수다. 경제적 자립이란 노동을 안해도 생존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경제적 자립 상태에서 노동을 하고 안하고는 전적으로 본인의 선택이며, 이런 상태에서 행해지는 노동은 이미 노동이 아니라 일종의 유희다.

 

경제적 자립 상태에 도달한 경우로 재벌 총수와 자산가 등을 들 수 있다. 대기업 사장이라도 임명장을 받는 월급쟁이라면 경제적 자립 상태는 전혀 아니다. 상전이 있고, 누군가의 눈치를 살핀다면 경제적 자립 상태가 아닌 것이다. 출근하고 싶으면 하고, 하기 싫으면 자택에서 사람 불러 보고받는 재벌 총수가 노동을 한다고 볼 수는 없다. 그는 심지어 보고받는 것 조차 싫을 경우 아예 안받기도 한다. ^^

 

'어떠한 활동이 노동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기준은 '그 활동이 경제활동이냐 아니냐'가 아니고, '그 활동을 하고 안하고가 본인 의지에 따라 결정되느냐 아니냐'이다.

 

경제적 자립을 가능케 해주는 특정 아이템이 있다면, 그 아이템의 가치는 어느 정도일까? 돈 따위로 그 가치를 산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가치있는 삶은 누리고 경험하는 삶이다. 하고픈 것은 산더미인데, 입에 풀칠하느라 누리지 못하는 삶은 비참하다. 비참한 삶이 대부분이라는 점은 비극이다.

 

개인의 삶은 3부류

개인의 삶은 3부류로 나뉜다.

 

- 자산가

하고픈 것을 맘껏 누리며 살았으니 억울할 것은 없다. 다만 생의 마지막 시점에 밀려드는 허망함까지 피하지는 못한다.

 

- 수행자 ​

인생을 충분히 음미하며 사색의 여유라도 누렸다.

 

- 노동자와 영세자영업자들 ​

인간사회 구성원의 대부분이다. 노동으로 평생을 보내기 때문에 불쌍한 사람들임에도, 불쌍한 존재임을 스스로 애써 부정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사람들을 위로하는 흔한 헛소리가 '노동으로 자아를 실현한다' 혹은 '노동은 신성하다' 따위다. 이런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극심한 노동을 해본 적이 없거나 피상적으로 해본 자들이라서, 노가다나 공장노동을 하루만 해봐도 입을 닫고 조용해진다.

 

노동에 시달리다 끝내는 삶은 수행자나 자산가의 삶에 비해 매우 짧다. 삶에 여유가 없어서인데, 이런 삶에서 사색은 사치에 불과해 기계적으로 살다 간다. 한 마디로 지지고 볶이다보니 어느새 갈 시점이 되고 마는 것이라, 찰나적 인생을 면치 못한다.

 

종교와 장사

기독교에 의하면 예수의 죽음이란 사건으로 인류의 원죄가 씻겨졌다고 한다. 인류의 원죄란 최초의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최초의 조상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인류의 원죄가 되었다는 것이 공감되지 않지만, 인류의 원죄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씻겨졌다는 것도 납득되지 않는다.

 

기독교는 아무런 증거도 없는 인류의 원죄란 거대서사를 특정 사건(예수의 죽음)과 엮어 특정한 주장(원죄가 씻겨짐)을 한다. 기독교 주장대로 예수의 죽음으로 인류의 원죄가 씻겨졌다 해도 문제는 남는다.

 

해당 사건이 AD 32년에 일어났다고 하면 AD 31년에 태어난 애는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고 AD 33년에 태어난 애는 죄인으로 태어나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한 끝 차이로 죄인 여부가 갈리는 것이다. 해당 사건으로 원죄가 씻겨졌으면 됐지 그 차이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반문할 수 있겠다.

 

하지만 BC 100년에 태어나 BC 50년에 세상을 떠난 사람이 원죄로 인해 지옥을 갔다가 AD 32년에 원죄가 씻겨짐으로 인해 구원받았다고 가정하자. 그는 단지 일찍 태어난 죄로 인해 지옥에서 무려 82년을 생고생한 셈이 된다.

 

이런 식으로 기독교에 공평과 불공평 문제를 제기하면 줄줄이 사탕이다. 이러한 공평과 불공평 문제에 설득력 있는 답을 못할 경우 내미는 카드가 ‘신’적 차원이란 용어다. 인간 사고로는 ‘신’적 차원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얼핏 불리하면 써먹는 카드로 쓸만한 듯 보이지만 ‘신’적 차원이란 신을 믿는 자들에게만 통하는 용어다.

 

신이 존재해야만 ‘신’적 차원이 존재할 것이므로 신을 안믿는 자에게 ‘신’적 차원이 있을 리 만무하다. 신적 차원이란 용어는 한 쪽에게만 통하는 반쪽 짜리 논리에 불과한 것이다.

 

신을 믿는 진영과 신을 안믿는 진영은 진보와 보수처럼 둘로 나뉘어져 있다. 이런 상태에서 상대 진영을 설득하려면 한 진영에만 통하는 논리로는 어림도 없다. 양 진영 모두를 아우르는 일반적 논리라야 상대 진영을 설득시킬 수 있다. ‘신’적 차원이란 일반적 논리가 아닌 특수 논리다.

 

‘신’적 차원을 주장한다면 ‘무신’적 차원으로 대응할 것이다. 그리 되면  <‘유’와 ‘무’가운데 어느 쪽이 더 상위인가?>의 논쟁이 이어지게 된다.

 

 

구약 성경이 주는 메시지의 결함은 신이 자신을 믿으면 상을 주고, 자신을 안믿으면 벌을 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내에서 삼국시대나 고려시대에 살다간 사람들이 모두 벌을 받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 대목에서 난처해진 가톨릭은 급기야 교회 밖에서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고 입장을 선회했다. 물론 개신교는 요지부동이다. 요지부동 개신교도 문제지만 유연해진 가톨릭도 떳떳하지만은 않다. 구원이 무슨 엿가락도 아니고 시대에 따라 구원 기준이 틀려지는가란 문제를 제기하면 코너에 몰리게 된다.

 

신을 믿건 안믿건 양 진영에 똑같은 사실은 두 진영 모두 신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모른다는 점이다. 보도 듣도 못했으니 양 진영 모두 신이 존재하는지 여부를 모르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몰라도 믿고 보자는 쪽과 모르니까 못믿겠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믿는 진영 : 일단 믿어서 사후 구원받으면 좋고, 사후 구원이 없다고 해도 손해볼 것 없다. 안믿었다가 사후 불이익을 받는 불상사는 피하고 보자.

 

안믿는 진영 : 사후 구원이 없다고 해도 손해볼 것이 없다고? 교회에 갖다 바친 금전과 시간이 손해가 아니면 무엇이 손해인가?

 

 

믿고 본다는 것은 의구심을 거둔다는 것이고 못믿겠다는 것은 의구심을 못거둔다는 것인데, 못믿는 쪽이 좀더 상식에 부합하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 할 수 있다.

 

자칭 주식 전문가 10명이 각기 개인 사이트를 만들었다고 하자. 그들은 회원모집에 목을 맨 사람들이다. 당연히 개인 사이트마다 온갖 화려한 치장을 할 것이다. 엄청나게 급등한 종목을 급등 초기에 자신이 추천했다고 할 것이다. 종목을 열 개 추천했다고 하면 그 중 급등 종목은 나오게 되고 급락한 종목도 나올 것이다. 유리한 것은 남기고 불리한 것은 슬그머니 감춘다. 그 결과 급등한 종목만 선전에 이용된다.

 

그들의 개인 사이트의 화려한 치장을 보고 이걸 덜컥 믿는 사람과 의구심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 어느 쪽이 더 상식적이고 이성적이며 합리적인지는 자명하다. 장사꾼과 종교를 비교함은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나올 것이다. 미안하지만 장사와 종교는 큰 차이가 없다. 둘 모두 이익을 추구한다. 물론 종교가 장사처럼 대놓고 드러나게 이익을 추구하진 않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남는 것이 있어야 장사고 종교고 유지된다는 점에서 양자는 정확히 같다. 여기서 말하는 종교는 오리지널에서 벗어난 단체화된 집단을 말한다.

 

구원이라는 달콤한 열매로 유혹하는 종교와 수익이라는 달콤한 열매로 유혹하는 장사꾼은 다르지 않다. 물론 기독교 주장대로 신이 존재해 사후심판이 있다면 얘기는 틀려진다. 하지만 신과 사후심판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장사와 종교가 같다는 거다. 신을 믿든 안믿든 둘 모두 신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른다는 점은 정확히 같다.

 

합리적 사고를 했던 과거 유럽의 계몽주의자들과 20세기 이후의 물리학자들은 하나같이 무신론자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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